#6 해설
2016년 LEET 언어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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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민족의 성쇠는 매양 그 사상이 지향하는 바에 달린 것이며 사상이 지향하는 바의 혹 좌, 혹 우는 매양 모종 사건의 영향을 입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나는 일언으로 대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 13년 서경(西京)의 전역(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서경 전역을 역대의 사가(史家)들이 다만 국왕의 군대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가(郎家)·불가(佛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 이 전역을 어찌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인종이 즉위하매 낭가와 불가와 기타 무장과 시인(詩人)의 무리가 분기하여 황제를 칭하고 북쪽으로 금나라를 정벌하기를 강경히 주장함에 이르렀다.
칭제북벌론의 영수는 첫째 윤언이니, 윤언이는 곧 윤관의 아들로 유일한 낭가의 계통이라 본 논(論)의 영수됨이 필연코 당연한 일이며, 둘째 묘청이니, 묘청은 서경 승도(僧徒)로 도참(圖讖)의 설을 유포하여 서경에 천도하고 제호(帝號)를 칭한 후 북으로 금을 치자는 자이며, 셋째 정지상이니, 정지상은 당시에 이름을 떨치던 시인이요 강토의 확대를 몽상하던 인물이다.
이 삼인이 칭제북벌에 대한 의견은 동일하나, 다만 묘청과 정지상은 서경 천도까지를 주장하였고, 윤언이는 거기 부동의하던 바이다.
『고려사』에 묘청을 요적(妖賊)이라 하였다.
이는 묘청이 음양가의 풍수설로 평양 천도를 앞장서 주장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대개 신라 말엽부터 평양 임원은 대화(大華)의 세라 여기에 천도하면 36국이 와서 조공을 바치리라는 비결이 유행하였다.
평양을 도읍으로 삼음은 역대 왕조에서 기도하던 바이나 기실은 평양에 천도하면 북쪽 오랑캐에 가까워지니 만일 적기(敵騎)가 압록강을 건너는 때에는 도성이 먼저 병화의 요충(要衝)이 되므로 실로 당시 도성될 지점에 결코 마땅치 않거늘, 칭제북벌론자가 매양 평양 천도를 전제로 함은 비상한 실책이니 윤언이가 전자를 주장하고 후자에 부동의함은 과연 탁견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나 비결과 풍수설로 평양 천도를 주장함은 묘청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니 이로써 묘청을 요적이라 함은 너무 억울한 판결이다.
당시 칭제북벌론에 경향(傾向)한 자가 거의 전국인의 반이 지나며 군주 인종도 10의 9분은 묘청을 믿었다.
이같이 성숙한 시기를 선용치 못하고 서경에서 거병하여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천도하여 그 국호와 연호를 받기를 요하니, 그 시대 신하의 예로 그 얼마나 발호(跋扈)한 행동인가? 이같이 발호한 행동을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내부가 공고하고 실력이 응후한 뒤에 발표할 것이 아닌가? 인종이 비록 나약하나 어찌 대위국 황제의 허명을 탐하여 서경으로 즐겨 이어(移御)하였을 것인가? 윤언이가 비록 묘청의 칭제북벌론에 동의하던 일인이나, 어찌 이같이 광망한 거동에야 일치할 수 있을 것인가?
윤언이는 고사하고 묘청의 친당들도 거병의 소식이 처음 송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이 차차 분명하여 오매 칭제북벌론자는 모두 와해되고, 반대자 등이 작약하여 김부식이 원수로 묘청 토벌의 길에 오르며 정지상 등은 출병 전에 김부식에게 피살되고, 윤언이는 김부식의 막하가 되어 묘청 토벌자의 일인이 되게 되었다.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낭가의 윤언이 등은 겨우 유가의 압박 하에서 그 잔명을 구차히 보존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조선은 창업이 곧 이 주의로 성취되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비록 갑오·을미개혁의 시기를 만날지라도 진흥대왕과 같은 경세가가 일어나지 않고 외세를 따라 바뀌는 사회가 될 뿐이니, 아아 서경 전역의 지은 원인을 어찌 중대하다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과 같이 주장한 핵심적인 이유는?
① 낭가와 불가가 힘을 합쳐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대한 저항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② 북진 정책이 좌절되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③ 서경 천도의 실패로 음양가의 풍수설이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④ 낭가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이 소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칭제하고 연호를 세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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