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해설
2013년 LEET 언어이해
문제 번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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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법은 오랫동안 선에 비해 부차적인 것, 혹은 선을 닮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법은 신들이 버린 세계 속에 있는 선의 유사물이자 최상의 원리인 선의 모조품이었다.
플라톤 식으로 표현하면, 선의 이데아를 따르기 위해 현상계의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선의 모방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이 모방은 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법과 선의 이와 같은 고전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존재의 본질과 연결된 자연법론의 형태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동질적인 이해가 확보된 조건하에서만 유용할 수 있다.
만약 서로 다르고 모순적인 세계관들이 충돌하게 되면 자연법론은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얻는 대가로 끊임없이 그 내용을 포기해야만 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근대적 법 이론가로서 칸트는 인간의 실천이성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도덕법칙에 주목하여 법과 선의 관계를 재규정함으로써 자연법론에 닥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의 자유를 인격적 자율과 그에 따른 책임으로 이해하면서 윤리적 행위를 규정하는 도덕법칙으로 정언명령을 제시한다.
도덕법칙이 명령으로 등장하는 까닭은 인간의 자연적 경향이 항상 선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이 선의 이념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는 규범이며, 무조건적인 준수를 요구하는 명령이다.
하지만 정언명령은 어디까지나 순수 형식의 표상으로서 대상, 지역, 상황들과는 무관하고, 그 속에는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행위가 순응해야 하는 형식적 법칙만을 무조건적으로 명령할 뿐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고 하는 명령을 실천이성의 원칙으로 선언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칸트의 주장에서 법이 선의 주위를 맴돈다는 종래의 생각을 전도시켜 오히려 선이 법의 주위를 맴돌게 만들려는 기획을 찾아낸다.
칸트의 이런 기획에 따르면 법은 더 이상 선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고 도리어 법의 입장에서 선을 규정한다.
실천이성의 법칙으로서 법은 선이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보편적인 형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의 기획을 이끄는 핵심 논리는 정언명령을 유일하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법으로 내세우면서 이에 대한 복종을 선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복종 그 자체를 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근대적 법 이론의 역사에서 법과 선의 관계를 전도시키는 칸트의 기획은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특수한 형태의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정언명령은 순수 형식이며 그 안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오로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만 구체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 관하여 들뢰즈는 카프카의 소설을 예로 들어 법의 실행 문제를 제기한다.
카프카
의 작품 「유형지에서」에는 형벌 기계가 나오는데 그 기계 안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모른 채 처벌을 받는다.
그 처벌은 그 사람의 죄명을 그의 몸뚱이 위에 바늘로 기록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법을 위반한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을 통해서 비로소 그 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법의 실행을 판결과 집행으로 이해할 경우, 칸트의 기획은 결과적으로 ㉠ '우울증적 법의식'을 초래하는 사태를 피하기 어렵다.
정언명령에 대한 복종은 선 그 자체이므로 정언명령은 선의 지를 가질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언명령은 그것을 위반하지 않는 한 구체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칸트의 기획에서 정언명령은 인간에게 선의지에 대한 무조건적 추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의지를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휩싸이게 된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언명령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하지만 정언명령을 위반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칸트의 기획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죄의식에 시달리게 만든다.
정언명령에 대한 복종 요구에 엄격하게 따를수록 이 죄의식은 더욱 커진다.
근대적 법 이론가로서 칸트는 인간에게 스스로의 내면에서 실천이성이 명령하는 법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의 기획은 법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통해 인간에게 죄의식을 증대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 토대인 인격적 자율을 훼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법의 실행을 다르게 이해하지 않는 한, 우울증적 법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칸트의 기획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이제 인간은 법을 주군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선의 주변부로 돌려보내고 다시 선을 주군으로 삼아 법을 다스리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에 대해 칸트가 취할 수 있는 입장과 상충하는 것은?
① 죄의식은 주관적인 심리 현상일 뿐이므로 인격적 자율과 책임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② 정언명령 앞에서 죄의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정언명령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③ 법의 실행을 도덕법칙에 따른 입법 행위로 이해하면 인격적 자율이 더욱 잘 구현되고 죄의식도 예방할 수 있다.
④ 법죄 행위는 그 행위의 준칙을 보편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법성이 명백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죄의식이 아니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⑤ 인간의 실존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면서도 법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계속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 입법의 원칙에 비추어 정당화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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