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해설
2018년 LEET 언어이해
문제 번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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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예이츠는 어느 편지에서 "내게 지상 목표는 비극 한가운데서 사람을 환희하게 만드는 신념과 이성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라고 하면서, "동양은 언제나 해결이 있고, 그러므로 비극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오. 영웅적인 절규를 발해야 하는 것은 우리지 동양은 아니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대조는 기실 동서 양분론에 기초를 둔 혼한 관념 이상의 것은 아니다.
이 대조가 어떤 진실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예이츠의 견해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근대 한국시의 몇몇 순간들은 비극적 황홀 을 볼 수 있는 예이츠의 만년의 시 「유리」에 비길 만하기 때문이다.
햄릿과 리어는 즐겁다
두려움을 송두리째 변모시키는 즐거움
모든 사람들이 노리고 찾고 그리곤 놓쳤다
암흑, 머릿속으로 타들어 오는 천국
비극이 절정에 달할 때
근대 한국시사에서 황매천과 이육사와 윤동주가 보여주는 비극적 황홀의 순간들은 그들이 상황에 참여한 방식에 따라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유생이며 전통적 원칙주의자인 황매천은 소극적 저항의 삶을 살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선택한다.
그는 일제의 국권 강탈에 항거하여, "난리를 겪어 나온 허여센 머리/죽재도 못 죽는 게 몇 번이던뇨./ 오늘에는 어찌할 길이 없으니/바람 앞의 촛불이 창공 비추네."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바람 앞의 촛불'의 이미지로 자신이 성취한 비극적 황홀의 순간을 표현했던 것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운 이육사의 시는 겉으로는 형식적인 균형과 절제에 바탕을 둔 고전적인 풍격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시는 현대적인 혁명가로서의 이상주의를 품고 있다.
혁명가로서의 삶을 가장 힘차게 나타낸 작품 「절정」에서 시인은 자신이 부딪치게 된 식민지 상황을 한계상황으로 표현한다.
시인은 자신이 비극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깨닫고 '겨울' 즉 '매운 계절'을 '강철로 된 무지개'로 본 것이다.
이 비극적인 비전은 또 하나의 비극적 황홀의 순간을 나타내거니와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기가 놓인 상황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의 객관적인 이미지를 발견함을 본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윤동주는 비록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는 했지만, 황매천처럼 가차 없는 비평가도 아니었고, 이육사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투사도 아니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시대를 괴롭게 살다 죽어간 외롭고 양심적인 문학도였다.
그의 생애의 수동적인 외관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죽음을 일종의 황홀 가운데서 꿈꿀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다.
그의 소원이 실현될 때까지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십자가」)를 흘림으로써 비극적인 상황에서 놓여나기까지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들의 비극적인 비전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비전은 사유와 관조 또는 명상의 산물이었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시인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얻은 충분히 자각된 비전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동양인의 정신에
특유한 초연함과 달관의 상태로 생각된다.
동양에서 비극적인 순간은 흔히 주인공의 신념에 찬 행위보다 초연한 관조 속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예이츠가 생각한 것처럼 동양에는 비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양처럼 열정적이거나 아단스럽지는 않을지라도 그 나름의 비극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다룬 모든 시인에게 공통된 또 하나의 특징은 시인이 그러한 비극적 순간의 작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동양에 있어서 시의 전통적인 개념 및 성질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중국에서 시에 관한 오래된 정의는 '마음속에 있는 바의 발언', 즉 ㉠ '언지(言志)'이다.
이러한 뜻에서의 시는 작품과 시인 사이의 구별을 용납하지 않는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시이다.
허구로서의 '포에시스'의 개념과는 반대로 동양에서 시는 시인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수양의 일부이며 내면생활의 직접적인 음성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비극이 허구적인 세계에 형상화된 경우로 존재하지 않고, 비극이 있다면 시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비극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 예이츠가 만년에 시적 계획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적인 이상으로서 매우 골몰했던 바이다.
그것은 그의 '지상 목표'였으며, 그가 "모든 사람들이 노리고 찾고 그리곤 놓쳤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극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세 사람의 한국 시인들은 이 어려운 이상을 그들의 삶과 시에서 실현했으며, 적어도 황매천과 이육사의 경우 그들의 비극적 황홀의 시적 가치는 기이하게도 예이츠의 인식과 흡사했다.
비극적 황홀 에 대한 글쓴이의 입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시인의 비극적 삶은 시에서의 비극적 황홀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② 비극적 황홀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 외에 작품을 창작하는 작자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③ 비극적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비극적 황홀을 통해 독자들의 현실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상적인 서정시이다.
④ 비극적 황홀은 주인공의 신념에 찬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관조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⑤ 햄릿이나 리어 같은 주인공이 도달한 비극적 황홀은 절망적 상황을 극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얻어지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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