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해설
2005년 5급 PSAT 언어논리
문제 번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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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서 필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를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이이의 이른바 '십만 양병설'은 그 수제자로 알려진 김장생이 이이가 죽은 뒤에 지은『율곡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선조실록』이나『경연일기』등 당대의 기록을 모두 들춰 봐도 이이가 십만 양병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찾기 어렵다.
그가 병조판서를 맡았을 때 변방에 소요가 일어나자 그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조선조 역대 병조판서의 통상적 발언이었을 뿐이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이이의 제자와 그 후예들은 십만 양병설을 자주 거론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인구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모두 합하여 10만을 양병하자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이익 같은 실학자도 그런 주장이 민본 정치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였고, 실제로 효종 때 어영청 군대 3만을 양성하면서 국가 재정이 고갈되어 허덕대다가 결국 실패한 사례도 있다.
이이가 십만 양병을 주장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근거는 또 있다.
동인인 유성룡이 경연석상에서 서인과 가깝던 이이에 반대하여 십만 양병설을 무산시킨 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문성은 과연 성인이다."라며 탄식했다고 김장생은『율곡행장』에서 적고 있다.
그런데 이이의 시호인 '문성공'은 인조 2년(1624)에 정한 것이고, 유성룡은 그보다 17년 전인 선조 40년(1607)에 죽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이를 '이문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 김장생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십만 양병설은 국방에 대한 교훈적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 신빙성은 약하다.
후대에 기록된 역사서로서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연려실기술』도 앞서의 기록을 인용한 데 불과할 따름이다.
<보 기>
ㄱ. 이이가 서인과 가까웠기 때문에 유성룡이 반대했다.
ㄴ. 이이는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ㄷ. 김장생이 이이의 수제자라는 것은 역사적 신빙성이 약하다.
ㄹ.『선조실록』과『경연일기』에는 이이가 십만 양병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없다.
ㅁ. 김장생은 유성룡이 이이를 '이문성'으로 불렀다고 아무런 해명 없이 적고 있다.
① ㄱ, ㄹ ② ㄴ, ㄷ
③ ㄴ, ㄹ ④ ㄷ, ㅁ
⑤ ㄹ,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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